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주 4.3사건 (문단 편집) == 기원 == 사건의 기원은 [[1947년]] [[3월 1일]]에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삼일절]] 기념 제주도 대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행사를 끝낸 군중들이 가두 시위에 들어갔고 그 중에 기마[[경찰]]에 아이가 채이고 [[경찰]]이 이를 모르고 지나가는 작은 소동이 발생하여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이가 말에 채인 사건 자체가 없었고, 좌익 분자에 의한 선동으로 경찰서 습격 시도가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 사건에 관해서는 목격자가 엄연히 존재하며, 시위 중에 벌어진 일도 아니었다.'''그리고 피해자 무덤까지 있다!!!'''] [[박헌영]]의 비서 출신이라고 자처하는 [[박갑동]][* 이 사람은 자신이 남로당 중요간부 출신이라고 스스로 자칭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기자이자 남로당 하급간부 출신이다. 남로당 어떤 간부 명단을 봐도 안나오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과거 중앙정보부에 포섭돼있다. 이 사람이 오늘날 극우 반공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제주 4.3은 북한 공산당 주도 폭동 지령에 의한것'이라는 이른바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 최초 주장자.-1973년 중앙일보를 통해 해방정국 시기 조선공산당과 남로당에 대해서 많은 글을 연재,기고했었다. 훗날 6월항쟁 이후 제주도 지역신문사인 제민일보에서 '남로당 중앙당 폭동 지령설'에 대한 사실여부를 밝히기 위해 이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일본 도쿄에 가서 취재, 인터뷰해본 결과 박갑동 자신도 '나도 그 근거는 모른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중앙 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중앙일보에 연재할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고 밝혔다.[[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60453|#]][[http://www.je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60673|#]] 따라서, 이 사람이 쓴 회고록과 주장들은 상당부분 잘못된 정보들이 많으므로 걸러들을 필요성이 있다.]은 이 사건을 이용 [[선동]]하여 공산당이 제주도에서 어느정도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경찰은 군중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줄로 알고 발포하여 소수의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이 사건 이후로 중앙정부에 사과를 요구하는 민관합동파업(!)이 도내에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당연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파업에 참여한 66명의 경찰이 해임되고 그 자리는 [[육지]](한반도 본토)에서 온 [[서북청년회]][* 약칭 서청. 대부분 [[북한]] [[평안도]] 지역 지주 계층 출신으로, 북한의 토지개혁 때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손으로 월남한 사람들로 구성된 반공 단체다. 따라서 사회주의에 대해 엄청난 피해의식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분단 초기 이들은 일종의 의용군 비슷한 조직으로 경찰과 함께 좌익 탄압이나 빨치산 진압 등에 투입되었으며, 대한민국의 정부 체계가 잡혀감에 따라 차츰 군대나 경찰 같은 공식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소속 사람들로 충원되었다. 이후 각종 고문치사 사건들이 발생하고 서북청년회의 패악질이 극심해지면서 민심은 극단으로 치닫기에 이르렀다.[* 새로 부임한 유해진 지사는 대놓고 "일반 대중을 극좌단체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극우단체의 힘을 빌렸다"고 발언했다. 제주도를 감찰하던 미군정 넬슨 중령은 "유 지사가 무모하고 독재적인 방법으로 정치이념을 통제하려는 헛된 시도를 해왔고... 경찰은 수없이 테러활동을 했다"며 사태가 봉기로 치닫을 가능성을 경고했다.] '''이것이 [[헬게이트|지옥]]의 씨앗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